[感想文] [논평문] 백용성스님의 靑少年 포교에 관한 연구에 대한 논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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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2-0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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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 분야 가운데 특히 ‘靑少年(청소년) 포교’에 초점을 맞추어 마련된 이번 세미나에서, 용성스님 연구에 업적이 많은 보광스님의 “백용성 스님의 靑少年(청소년) 포교에 관한 연구”에 대한 글은, 저자 자신이 미리 밝혔듯이 “극히 미약한” data(資料)나마 발굴하고 해설을 시도한 의미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논평자의 의무 때문에 다소 아쉬운 점을 적으며 몇 가지 질문을 하여 논의거리를 삼고자 한다. 아울러 역경과 포교에 선구적 역할을 하셨고, 선농일치 운동 등 불교 문중의 생산적 모범을 보이셨으며, 민족독립운동과 교단정화 노력 등 대사회적 지도력을 발휘하셨다. 따라서 이 기간을 悟道修行期라고 할 수 있다 유년기나 靑少年(청소년) 기로 구분하기보다 오도수행기라 하겠다”고 하였는데, ‘오도수행기’라는 뜻이, ‘오도’하여 ‘수행’하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표현인지 궁금하다. 혹시 그분의 불우한 유년시절의 아쉬움이 노년기에 회상되며 아동들에 대한 자비스런 배려로 표출되지는 않았는지? 특히 어려운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으로 승화되지 않았는지? ‘아동교과서’ 저술은 ‘靑少年(청소년) 포교활동’에 포함되지 않는지, 아니면 그와 버금가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2. “용성 스님의 유년시절” 부분의 마무리 단락에서, “16세에 출가하여 23세까지는 수행정진에 전력하여 오도를 체험하게 된다된다. 서론에서 언급되었을 법한 “용성스님의 유년시절”에 대한 전제가 필요한 이유에 대한 설명(說明)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부분이 그 후에 끼친 effect(영향) 이나 관련된 설명(說明)도 없는 것이 의아하다.
논…(drop)다. 가장 긴 분량을 할애한 “용성스님의 유년시절”의 사상과 체험이 그 분의 “靑少年(청소년) 포교활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궁금하다. 만일 ‘수행정진’하여 ‘오도’하였다면, ‘수행오도기’라고 하여야 되지 않을지?
3.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靑少年(청소년) 포교활동”부분은 ??佛敎?? 48호 기사인 ?大覺日曜學校設立?와 ?조선글 화엄경 강의회?의 인용과 해설이 전부인데, ‘일요학교’의 설립(1928년 4월 15일) 후, 20여 일만의 (동년 5월 6일까지) 학예회 사실만 언급되었을 뿐, 그 이후의 활동과 지속여부는 전혀 언급이 없어, 그것만으로 ‘靑少年(청소년) 포교활동’을 전부 설명(說明)하기는 부족한 감이 있는데, 보충할 data(資料)는 전혀 없는지?
4. “아동교과서 저술”부분에서는 ??조선글 화엄경??의 ?저술과 번역에 대한 연기?에 나타난 ‘인쇄되지 못한’ 책 목록 가운데, ??대각교 아동교과서??라는 서명만 보인 사실을 설명(說明)하며, “만약 그 원고가 어딘가에 남아 있다고 한다면 용성선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뿐만 아니라 한국불교 靑少年(청소년) 포교사에 큰 업적을 남기리라고 생각 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책의 내용과 규모를 어느 정도로 짐작할 수 있는지?
5. “結論(결론)” 부분에서 “용성 스님의 유년시절”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는데, 가장 길게 쓴 부분의 취지가 結論(결론)에서 들어나지 않는다면, 또는 들어낼 것이 없다면 그 부분은 drop해도 무방하지 않은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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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대표적 고승 용성 큰스님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선사, 법사, 율사 등으로 경칭되고 있듯이 선ㆍ교ㆍ율 등 불교의 대부분에 걸쳐 탁월한 선지식이었다.